스텔스기, Google의 무인 자동차, 인터넷도 DARPA가 산실

스텔스 항공기 개발, DARPA가 주도
스텔스 항공기의 개발 과정은 DARPA가 일하는 방식을 잘 보여준다.

 

연구의 발단: 국방부의 문의
냉전이 한창이던 1974년, 미국 국방부(Dept. of Defense)의 모의 전쟁(War Game)에서 소련의 대공 방어망이 심각한 미래 위협으로 부상했다. 산하 연구소들에서 결정적 해결책(Silver Bullet)을 얻지 못한 국방부는 DARPA에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문의했고, DARPA의 해당 Office Director(부서장) Robert Moore는 스텔스 항공기(High Stealth Aircraft)란 아이디어를 과제로 선정, 연구에 착수했다. 스텔스 연구 프로그램은 국방부의 무인 정찰기 시스템 부서에 근무하던 Ken Perko가 DARPA의 프로그램 매니저 자격을 얻어 담당했다.

 

 

연구의 진행: 주요 전투기 개발 업체의 참가
프로그램 진행 과정에서 산·학계의 광범위한 아이디어 탐색을 통해 다음의 두 가지 질문이 핵심 이슈로 규정되었다. 첫째, 항공기가 탐지되지 않으려면 레이더 단면적(Radar Cross Section, RCS) 값은 얼마나 작아야 하는가? 둘째, 충분히 작은 RCS 값을 가진 유인 항공기의 생산이 가능한가? 두 가지 질문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프로그램 매니저 Ken Perko는 주요 전투기 생산업체 5개사의 선진 개발(Advanced Development) 부서들을 스텔스 프로그램에 초대했는데, 그루먼(Grumman), 노스럽(Northrop), 맥도넬 더글라스(McDonnell Douglas)의 3개사만 참가했다. 연구가 진행되면서 그루먼이 먼저 탈락했고 제일 먼저 적절한 RCS 값을 찾아낸 맥도넬 더글라스도 스텔스 항공기 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중도 포기했다. 그 와중에 전투기 생산 실적이 거의 없어 DARPA가 외면했던 록히드의 스컹크 웍스가 자발적으로 참여를 요청해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단돈 tpf=board/list&board_code=1짜리 연구 계약을 체결한 후 자체 자금으로 스텔스 기술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의 종료: 기술 개발과 함께 종료
축소 모형과 실물 크기의 기술 실증 경쟁을 펼친 록히드와 노스럽 중에서 최종 승자는 록히드였다. 충분한 결과를 얻은 DARPA는 스텔스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시제기(Prototype) 개발 업무를 미 공군의 특수 프로젝트로 이관했다. 유명한 보석 Hope Diamond와 흡사한 외형을 빗대어 Hopeless Diamond라 불리던 록히드의 시제기는 미 공군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 완료되었다. DARPA의 연구와 스컹크 웍스의 개발로 완성된 최초의 스텔스 항공기 F-117은 1977년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다.

 

 

Google의 무인 자동차, DARPA의 연구 프로그램에서 발전
DARPA는 무인 자동차(Autonomous Car) 기술 연구에서 신속한 결과를 얻기 위해 Lab 차원의 연구 프로그램 대신 우승 상금을 내건 경쟁 방식의 연구 프로그램을 개최했다. 대회는 총 3회 개최되었는데, 2004, 2005년의 대회는 야지 주행 능력 시험을 목표로 했고 2007년에는 시내 주행 능력을 시험했다. 2004년에는 참가팀 전원이 시험 코스 완주에 실패했지만 2005년과 2007년에는 각각 폭스바겐의 SUV 투아렉을 개조한 Stanley와 Passat Wagon을 이용한 Junior를 출전시킨 스탠포드 대학 팀이 연이어 우승했다. 당시 스탠포드 대학 팀은 폭스바겐의 ERL(Electronic Research Laboratory)과 Google의 후원을 받고 있었다. 이후 팀을 이끈 스탠포드대 교수 Sebastian Thrun이 2011년 학교를 떠나 Google에 합류해서 X Lab의 공동 설립자로 활동하면서 Google의 무인 자동차 프로젝트가 본격 출범했다.

 

 

인터넷의 시초, ARPANET
핵전쟁의 위협이 상존했던 1962년, ARPA는 오늘날의 Computing인 Command and Control 기능 관련 연구를 담당할 부서(Information Processing Techniques Office, IPTO)를 신설하고 MIT의 실험 심리학 교수였던 Joseph Licklider를 책임자로 영입했다. 이 부서에서는 핵전쟁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네트워크를 연구 과제로 삼았다.
한동안 지지부진하던 네트워크 연구는 분산형 컴퓨팅 기술 등이 개발되면서 가속화되었고 마침내 1969년 10월 UCLA와 스탠포드대 SRI 간에 통신망이 연결되면서 컴퓨터 네트워크 ARPANET이 탄생했다. 이후 사용자들이 증가하면서 원격 로그인(remote log-in), 파일 전송(file transfer), 전자 우편 기능, On-line Community 기능들도 보강되었다.
1983년 대폭 늘어난 사용량을 처리하기 위해 TCP/IP라는 새로운 통신 프로토콜이 적용되면서 ARPANET은 최초의 진정한 인터넷으로 발전했다. 이후 ARPANET은 미 국방부 전용망 MILNET과 분리되었다. 1986년 NSF가 미국 내의 5개소의 슈퍼컴퓨터 센터를 상호 접속하기 위해 TCP/IP를 사용하는 NSFNET라는 통신망을 구축했고 1987년에는 ARPANET를 대신해서 인터넷의 근간망(backbone network)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후 1989년 ARPANET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민간 분야의 연구 비중 50%
정치, 사회적 분위기에 부응한 정책 변화에 따라 DARPA의 연구 비중도 변했다. 냉전이 심화된 1970년대에까지는 대학을 동원한 기초 과학 연구 및 군사 관련 연구의 비중이 더 컸고 명칭도 국방(Defense)을 추가한 DARPA(1972년)로 개명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사회적 분위기가 대학, 기업, 연구소 등 다양한 혁신 주체들간의 연계를 통한 기업의 기술 역량 향상을 강조하는 쪽으로 바뀌면서 국가 안보와 산업 경쟁력 제고를 동시에 추구하는 민군 겸용 기술(Dual-use Technology)에 대한 연구 비중이 커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 들어 임무 지향형, Spin-off 방식의 기존 정책이 응용 기술의 실용화, 상업화를 강조하는 확산 지향(Diffusion-oriented)형으로 전환되면서 기초 과학 연구보다 첨단 응용 기술 개발, 국방 기술보다 민간 기술로 중점 연구 분야도 변했다. 그에 따라 국방 부문과 민간 부문의 연구 비중도 6:4에서 5:5로 조정되었고 한동안 ARPA(1992~1996년)로 개칭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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